
디지털 세계와 물리적 세계를 잇는 과정에는 정보 손실이 따른다. 크리스천 카일(Christian Keil)은 AI가 설계 능력에서 인간을 앞서더라도 부품 조달과 제조, 시험, 고객 선호 파악까지 해결해야 초인적 하드웨어 엔지니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카일은 처음 FPV 드론을 만드는 데 8개월이 걸렸다고 회고한다. 부품을 주문하고 조립한 뒤 드론에 불을 붙이고 이웃집 지붕에 추락시키고 나서야 비행 시뮬레이터를 내려받았다. 그는 현재 최첨단 모델이 CAD 설계와 맞춤형 PCB 설계, 시판 부품 조달, 조립 절차 설명까지 할 수 있지만, 실제 하드웨어 엔지니어링에는 설계 외에도 해결해야 할 단계가 많다고 본다. CAD Arena, EE Bench, LuxoBench의 결과는 관련 능력이 꾸준히 개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덧붙인다.
설계에서 대량 생산까지 이어지는 과제
카일은 하드웨어 제작을 다섯 단계로 나눠 설명한다. 기본 단계에서는 제품을 부품으로 나누고, 시판 부품의 호환성을 확인하고, 기계·전기적 연결을 설계한 뒤 실제로 조달해야 한다. 그는 2006년 팔콘 1의 시험 연소가 발사장에서 약 6,000마일 떨어진 곳에 재고가 있던 작은 커패시터 때문에 지연됐다는 사례를 든다. 이 이야기는 월터 아이작슨의 일론 머스크 전기에도 나온다(관련 자료).
맞춤 부품을 만드는 단계에서는 디지털 설계를 실제 기계가 실행할 작업 지시로 바꿔야 한다. 예를 들어 CNC 가공에서는 기계 엔지니어의 CAD 파일을 가공용 CAM 소프트웨어에 맞게 변환하고, 숙련된 가공 기술자가 소재와 고정 방식, 공구, 절삭 전략을 정한다. 이 과정은 변동성을 만들고, 변동성은 설계와 제조 사이의 오류로 이어질 수 있다.
부품을 조립할 때는 각 부품이 개별 도면의 기준을 충족해도 공차가 누적되거나 상관된 오차가 생겨 서로 맞지 않을 수 있다. 여러 팀과 외부 업체가 만든 부품을 결합하려면 요구사항과 일정, 위험을 공유해야 한다. 대량 생산에서는 부품과 공정의 편차를 더 세심하게 관리해야 하며, 장비와 재고에 필요한 자금을 더 일찍 마련하고 조립·통합·시험 인력을 훈련해야 한다. 공급업체의 생산 능력에도 한계가 생긴다. 카일은 스페이스X가 수직 계열화를 강조하지만 공급망 관련 직함을 가진 직원 591명과 추가 채용 공고 128개를 두고 있다고 언급한다. 이 수치는 2026년 9월의 LinkedIn 자료를 바탕으로 한다.
그는 AI가 특정 목적에 맞는 이상적인 부품을 설계하는 일과, 요구사항을 충족하면서 제조·조달이 쉽고 비용도 낮은 설계를 찾는 일은 다르다고 본다. 전자는 디지털 환경에서 다루기 쉽지만, 후자는 현실 세계와 더 많이 상호작용해야 한다.
현실을 측정하고 학습하는 데 드는 비용
물리적 세계는 균일하지 않고 계속 바뀐다. 물체에는 결함이 있고, 온도 같은 환경 변수에 따라 특성이 달라지며, 마모도 생긴다. 잘 조정된 공정과 측정 도구도 시간이 지나면 변한다. 따라서 제조 공정과 공급망의 입력·출력을 충분히 측정해야 문제가 생겼거나 공정이 달라진 시점을 파악할 수 있다.
현실 데이터는 드물고 수집 비용도 높다. 카일은 위성 프로그램에서 일할 때 열 관리팀이 위성 곳곳에 온도 센서를 설치하고 싶어 했지만, 소프트웨어·구조·생산팀도 설계 결정에 관여했다고 설명한다. 문제가 생긴 뒤에야 조립 중간 단계의 전자기판 사진이나 다른 위치의 센서 데이터가 진단에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깨닫기도 한다.
고성능이나 높은 신뢰성이 필요한 분야에서는 정밀한 측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밀 측정에는 비용과 시간이 들며, 가공 부품의 평탄도나 치수 등을 재는 좌표 측정기(CMM)도 저렴하지 않고 조달과 운용에 시간이 걸린다(좌표 측정기 제품 정보). 물리적 시험에는 고유한 지연도 있다. 전자기판의 열순환, 화학 용액 혼합, 기계 피로 시험은 일정 시간이 필요하다. 시험을 가속할 수는 있어도 한계가 있다.
또한 제품을 사용자가 얼마나 편하게 느끼는지, 손에 쥐었을 때 편안한지, 도구로 부품을 얼마나 쉽게 만들 수 있는지처럼 정성적인 정보도 중요하다. 이런 정보를 측정해 디지털 학습 과정에 다시 반영하기는 어렵다. 카일은 시험 결과를 수치화하고 기계가 읽을 수 있을수록 모델이 더 빠르게 발전할 수 있다고 본다.
AI 하드웨어 엔지니어링의 다음 단계
하드웨어 개발은 설계하고, 만들고, 시험한 뒤 다시 설계하는 반복 과정이다. 카일은 설계가 디지털 작업인 만큼 AI가 먼저 인간을 앞설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한다. 그러나 부품을 설계한 뒤에는 제작과 시험, 반복 개선이 남고, 각 단계는 앞선 단계보다 물리적 세계와 더 많이 맞닿는다.
그가 꼽은 과제 가운데 하나는 시뮬레이션 도구를 개선하는 일이다. Navier, Inviscid, Lanyon 같은 도구가 나아지면 엔지니어는 실제 시험 시설을 방문하는 횟수와 시설 구축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카일은 모델의 성능이 입증될수록 엔지니어가 시뮬레이션을 더 신뢰하게 될 수 있다고 예상한다. 실제 제작과 시험은 계속 필요하겠지만, 더 나은 시뮬레이션을 이용하면 실물을 만드는 단계가 탐색보다 확인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AI 설계 능력이 널리 보급되면 수요가 원자재와 부품에 가까운 단계로 이동할 수 있다고도 내다본다. 그는 와이어 하네스의 Senra Systems, 제어 패널의 Podium Automation, 가공 부품의 Hadrian, 전자 부품의 Cofactr, 구리의 Mariana Minerals을 사례로 든다. 텔레메트리용 Sift, 검사 소프트웨어 Instrumental, 시험용 Revel처럼 제조 과정에 쓰이는 소프트웨어 수요도 늘 수 있다고 본다.
기업이 자재 명세서에 포함된 작업을 직접 맡는 사례도 늘 수 있다. 카일은 전문 전기 엔지니어가 맞춤형 인쇄회로기판을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개발하도록 돕는 Diode를 예로 든다. 설계 능력을 더 많은 사람이 갖게 되더라도, 설계를 현실에서 구현하려면 공급망을 다루고 저렴하면서 정확하게 제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AI 연구소에는 제조 공정에 관한 지식도 필요하다. CNC 기계 소리만 듣고 작업 상태를 파악하는 가공 기술자나 반도체 제조 공정을 오랜 기간 다듬어 온 TSMC 연구진의 노하우를 모델이 배우려면 공정 전반의 데이터가 있어야 한다. 카일은 에릭 장(Eric Jang)의 로보틱스 데이터에 관한 글을 인용하며, 2026년 로보틱스 연구소가 수집하는 데이터는 수백만 시간의 1인칭 데이터에서 수만 시간의 원격 조작 데이터까지 규모가 크게 다르고, 고성능 시연을 위한 고품질 하드웨어별 데이터는 몇 시간에 불과하다고 전한다.
데이터 부족을 줄이는 방법으로는 실제 실험을 직접 수행하는 자율 연구소가 있다. 카일은 Periodic Labs가 초전도체와 자석, 반도체 소재 등을 대상으로 설계부터 작업 지시, 시험, 결과 측정, 반복 개선까지 수행하는 자율 연구소를 구축했다고 소개한다(관련 발표). 다만 그는 하드웨어 제품의 최종 사용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는 일은 자동화하기 특히 어려울 수 있다고 본다. 애플 워치의 설계를 수없이 바꾸고 저렴하게 제조하더라도, 고객의 실제 선호를 알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카일은 AI가 하드웨어 설계를 빠르게 해결하면 제조를 고려한 설계, 시험, 반복 개선처럼 현실과 더 많이 상호작용하는 단계로 개발의 초점이 옮겨갈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를 위해 디지털 세계와 물리적 세계 사이의 연결을 개선하고, 고객 선호를 더 빠르게 파악하며, 숙련 기술자에게 있는 공정 지식을 데이터로 축적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초인적 하드웨어 엔지니어링이 모든 분야에서 한꺼번에 도래하지는 않을 수 있지만, 현실의 제품을 만드는 능력까지 갖추면 영향은 클 것이라고 내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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